공지사항
춘천영화제 해외초청작 번역을 해 주신 백승록 번역가님의 애정이 담긴 글
작성자
ciff
작성일
2020-10-28 14:47
조회
3641
번역가의 시선
글. 백승록(영상번역 전문가)
번역가만큼 잔인하게 강제로 인연을 맺고 끊어야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작품과 만날 때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어색하고 가끔은 불편하기까지 한 낯섦을 극복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치 몇 년을 부대끼고 산 사이처럼 친숙해지지만,
마지막 문장을 만들고 나면 애정을 쏟았던 상대를 미련 없이 훌훌 떠나 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1년에도 수십 번의 만남과 이별을 거치다 보면 애틋한 감정을 느낄 사이도 없이 일 속에
무뎌지기 마련인데, 가끔은 마음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그 영화광적 애증을 심각하게 건드려서
끄집어내는 작품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2020 춘천 영화제에서 번역가로서 제가 관객보다 한발 먼저 만난 4편의 작품은 그렇게 일로
무뎌진 제 감성, 잊고 지냈던 영화에 대한 애정, 묻어 두었던 잠들었던 흥분을 두드려 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어두운 극장에 앉아 상영 시작을 알리는 로고와 시그널이 뜰 때,
그 두근거리는 기분. 두 시간을 온전히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기분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이미 끝난 영화를 곱씹으며,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아무 친구나
붙잡고 넘쳐나는 감흥을 쏟아내며 한없이 수다를 떨고 싶었던 기억…...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인 패트릭 리드 존슨 감독의 <5-25-77>은 바로 그런 영화광의 추억을
소환하는 작품입니다. SF 영화를 위한 <시네마 천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혹성탈출>, 큐브릭과 스필버그, 그리고 <스타워즈>를 거치며
70년대에 10대를 보낸 할리우드 키드의 성장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시절, 그 영화에 흥분했던
기억이 있는 중년 세대에게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이 영화는 이번 영화제의 테마
장르인 SF영화에 대한 춘천 영화제의 시선과 애정을 가늠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시대 젊은 감독의 똘끼(?)와 패기 넘치는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습니다.
<에라툼 2037>입니다. 그야말로 뒷마당에서 만든 듯한 어설픈 특수 효과와 돌출하는 유머,
어긋나는 편집 리듬까지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어색하지만, 그것마저도 한없이 귀엽습니다.
젊은 아마츄어만이 시도할 수 있는 작품이죠. 이런 발랄함과 반대되는 지점을 심각하게 달리는
두 작품, <마지막 땅>과 <태양에 가까이>는 우리가 쉽게 만나보기 힘든 유럽 SF만의 독특한 감성
과 철학적 분위기를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이 두 영화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 작품으로 하위문화
정도로 깎아 내리기 쉬운 SF 장르가 유럽 지형에서 어떤 식으로 인간의 실존의 문제와 결합하며
나아갈 수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색다른 깊이를 가진 작품입니다.
시대를 넘어, 시간을 넘어, 공간을 지나, 마냥 자유롭게 활보하는 SF 작품 속에서 대사 한 줄,
문장 하나하나와 열심히 씨름하다 보니 어느새 이 작품들을 관객 여러분께 보내드릴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별하는 시간이지만, 여러분에게는 특별한 만남의 시간이 되겠죠. 풀어내기
어려운 용어, 한국 관객의 정서와 맞지 않는 유머를 놓고 고민하며 밤잠을 설쳤지만, 힘들면서
그것마저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감독이 전달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에 제가 먼저 느낀
즐거움까지 더해서 몽땅 전달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거창한 바람을 품어봅니다.
제 땀과 애정을 담뿍 담아 2020 춘천 영화제 SF작품들을 여러분께 추천합니다.
글. 백승록(영상번역 전문가)
번역가만큼 잔인하게 강제로 인연을 맺고 끊어야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작품과 만날 때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어색하고 가끔은 불편하기까지 한 낯섦을 극복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치 몇 년을 부대끼고 산 사이처럼 친숙해지지만,
마지막 문장을 만들고 나면 애정을 쏟았던 상대를 미련 없이 훌훌 떠나 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1년에도 수십 번의 만남과 이별을 거치다 보면 애틋한 감정을 느낄 사이도 없이 일 속에
무뎌지기 마련인데, 가끔은 마음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그 영화광적 애증을 심각하게 건드려서
끄집어내는 작품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2020 춘천 영화제에서 번역가로서 제가 관객보다 한발 먼저 만난 4편의 작품은 그렇게 일로
무뎌진 제 감성, 잊고 지냈던 영화에 대한 애정, 묻어 두었던 잠들었던 흥분을 두드려 깨우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어두운 극장에 앉아 상영 시작을 알리는 로고와 시그널이 뜰 때,
그 두근거리는 기분. 두 시간을 온전히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기분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이미 끝난 영화를 곱씹으며,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아무 친구나
붙잡고 넘쳐나는 감흥을 쏟아내며 한없이 수다를 떨고 싶었던 기억…...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인 패트릭 리드 존슨 감독의 <5-25-77>은 바로 그런 영화광의 추억을
소환하는 작품입니다. SF 영화를 위한 <시네마 천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혹성탈출>, 큐브릭과 스필버그, 그리고 <스타워즈>를 거치며
70년대에 10대를 보낸 할리우드 키드의 성장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시절, 그 영화에 흥분했던
기억이 있는 중년 세대에게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이 영화는 이번 영화제의 테마
장르인 SF영화에 대한 춘천 영화제의 시선과 애정을 가늠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시대 젊은 감독의 똘끼(?)와 패기 넘치는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습니다.
<에라툼 2037>입니다. 그야말로 뒷마당에서 만든 듯한 어설픈 특수 효과와 돌출하는 유머,
어긋나는 편집 리듬까지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어색하지만, 그것마저도 한없이 귀엽습니다.
젊은 아마츄어만이 시도할 수 있는 작품이죠. 이런 발랄함과 반대되는 지점을 심각하게 달리는
두 작품, <마지막 땅>과 <태양에 가까이>는 우리가 쉽게 만나보기 힘든 유럽 SF만의 독특한 감성
과 철학적 분위기를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이 두 영화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 작품으로 하위문화
정도로 깎아 내리기 쉬운 SF 장르가 유럽 지형에서 어떤 식으로 인간의 실존의 문제와 결합하며
나아갈 수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색다른 깊이를 가진 작품입니다.
시대를 넘어, 시간을 넘어, 공간을 지나, 마냥 자유롭게 활보하는 SF 작품 속에서 대사 한 줄,
문장 하나하나와 열심히 씨름하다 보니 어느새 이 작품들을 관객 여러분께 보내드릴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별하는 시간이지만, 여러분에게는 특별한 만남의 시간이 되겠죠. 풀어내기
어려운 용어, 한국 관객의 정서와 맞지 않는 유머를 놓고 고민하며 밤잠을 설쳤지만, 힘들면서
그것마저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감독이 전달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에 제가 먼저 느낀
즐거움까지 더해서 몽땅 전달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거창한 바람을 품어봅니다.
제 땀과 애정을 담뿍 담아 2020 춘천 영화제 SF작품들을 여러분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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